사천 오백 구십 삼 킬로 미터라고 소리내어 읽었다. 한 음절씩 끊어
읽으며 연구개에서 공기가 긁혀 나오는 소리, 입술 사이로 공기가 밀려나오는 소리, 읽혀지는 소리를 들었다. 발음하여 읽는 것은 눈으로 읽는 것과 조금
다르다. 네 개를 나타내고 싶을 때 4라고 적지만, 읽을 때는 사아- 라고 발음하는 것 처럼, 소리내어 말하는 것은 눈으로 읽는 것와 다르다. 사, 오, 구, 삼 각 숫자들을
말할 때,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는 바로 그 순간에, 음절들은
각자 길을 놓는다. 사천 오백 구십 삼 킬로 미터를 차례로, 천
킬로미터짜리 큰 걸음을 네 번, 백 킬로미터를 다섯 번, 십
킬로미터와 일 킬로미터도 펼쳐 내놓는다. 비행기를 타고 여섯 시간을 가도 모자란 거리를, 소리내어 읽을 때면 몇 글자 만에 도달할 수 있다. 천천히 발음하며, 길을 놓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