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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보였던 일들은 쉽지 않았던 경우가 더 많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내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은 사실은 내가 보지 못한 부분들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당연히 해낸 것들이 있었다. 내가 모르는 신경써야 할 것들이 아주 많았다.  이렇게 간단히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일들이 나에게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을 때는, 객관적으로 그것이 아주 쉬운 일은 아니더라도, 내 능력이 부족한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고 나는 무력감에 빠졌다. 당연히 도전하면 익숙해지고 잘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잘못 생각했다. 어떤 종류의 일들은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도전한다고 해서, 계속해서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실적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단순히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꾀를 열심히 부려야 하고 왜 그래야 했는지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나는 여전히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되는 창작의 길을 알고 있는것만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 맥락을 파악하는 것은 완벽히 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 동안 많은 시간을 썼지만 그것은 일을 잘 하게 되는 것과는 별개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데에 시간을 쓴 것이 되었다. 그 과정이 쉽지도 않았고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내 능력을 활용하지 않은 것도 성장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결국 나에게 필요한 새로운 연구를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하는 것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결과를 얻을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남에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자신을 보며 회의감과 부담감만 늘어갔다. 손에 넣고 싶은 것이 많은데 넣지 못해서 잘못된 방법으로 그 욕망을 해소하려고 했다. 일시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술을 마시려 하거나 사람들을 통해 채우려고 했다. 내가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헤메였고 그래서 더욱 내가 원하는 것에서 멀어져 있었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아주 멋진 연구를 표준적인 과학적 탐구방식을 통해 해낼 수 있다면 정말 그것보다 멋진 일이 없...
해일이 일어났고  우리는 중요한 것들을 등에 지고 피난했다. 파도는 우리가 밟은 계단 한 움큼을 이미 삼킨 후 쓸려갔다가 저주파로 그릉대며 모든 것을 삼킬 것처럼 부서지고, 다시 그 위로 몰려들었다. 우리는 언덕을 버리고 육지로 돌아가기로 했다. 몰려오는 파도를 벽에 기대어 맞으며 네가 바다를 두려워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두고 온 짐들이 걱정되기 시작할 즈음, 우리는 파도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고 바다에 대해서는 모두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 어느 밤의 느티나무처럼, 그리고 바람을 타듯 팔을 조금씩 조금씩 흔들었다. 말들을 떠올리다가 지웠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나니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하지만 그건 실제일까. 가로수 밑에 서서 코를 팽하고 풀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뭔가가 바뀌었을까. 바뀌면 얼마나 바뀔 수 있었을까. 가로수는 잎을 다 떨구고 서서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오래 울고 난 사람의 아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질문들을 하기에 여기는 너무 한낮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정오가 넘은 지금은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한낮이었다. 김금희<너무 한낮의 연애> 발췌
책장에 꽂힌 죽은 사람들의 글에서는 참기 힘든 냄새가 났다 나는 그들과 다를 바 없이 감상에 젖어 우그러진 마음으로 일어나지 않을 일만 생각하다 하루를 모두 보내고는 그마저 식상하다며 찡그리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손발에는 무엇에 긁혔는지도 모를 상처가 늘어가고 전파도 닿지 않는 이곳에는 바람이 불어 금방이라도 비 내릴 구름이 몰려오는데 나는 춥고 습한 여기도 봄에는 볕 드려나 하고 가만히 있다 여기는 찾으러 올 사람 없는데
지구 반대편에서 가져온 네 기억들은 고운 가루로 만들어 뜨거운 물에 우려내고, 두 스푼씩 차갑게 식혀서 버릴 것이다. 하루에 두 스푼씩만 잊어버리다 보면, 5월 1일까지의 유통기한이 적힌 통조림처럼 어느 봄 같은 나날들이 다시 올 것이고, 그 날이 오면 모든 것이 하룻밤에 사라질 것 같다. 긁히고 닳은 스테인레스 잔에 물든 색채는 지워지지 않고, 저기에 사람의 뜨거운 마음이 담겼다가 식어 앙금을 남겼으니, 흙을 채워 볕에 둬도 외로운 식물 하나 자리잡지 못할 것이다.
 백 일간의 백야.  빛은 사람을 취하게 하고 동시에 깨어 있게 해. 나는 여기서 눈을 뚜고도 꿈을 꾸네. 네가 저 빙하 앞에 서 있는 것 같아. 햇빛 아래에서 푸른빛을 내던 너의 몸.  빛뿐인 고립 속에서 나는 남극 심부의 얼음을 시추하고 그 얼음에 새겨진 육십오만 년 동안의 기억을 알아내려 해. 나에게 이런 일을 할 만한 용기도 힘도 없다는 걸 알아.  그런데도 나는 여기에 왔다.  남극과 빙하, 백야와 흑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쩌면 네가 나이로비가 아닌 이곳, 얼음의 땅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환한 빙하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너. 너에 대한 환상이 나를 이 얼음투성이 대륙으로 이끌었던 거야.  네게 이 노트를 전하고 싶어. (...)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사람이 현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윤회한다고 했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리면 떼어낼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애도는 충분히 하되 그 슬픔에 잡아먹혀버리지 말라고 했다. 안 그러면 자꾸만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그 말이 무서웠다.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을 언제나 기억한다. (...)  사랑받고 싶은 마음, 누군가와 깊이 결합하여 분리되고 싶지 않은 마음, 잊고 싶은 마음, 잊지 않고 싶은 마음, 잊히고 싶은 마음, 잊히고 싶지 않은 마음, 온전히 이해받으면서도 해부되고 싶지 않은 마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 상처받아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 무엇보다도 보고 싶다는 마음. 최은영 <한지와 영주> 발췌
다시 눈을 뜨고 일어나서는 사랑한다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품에 안기거나 뛰어놀고 머리를 부비던 순간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래서 힘에 겨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도, 너를 믿는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해 힘을 짜내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영영 오지 않는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고, 이것만 이겨내면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나는 어떠해도 좋다는 마음으로 속으로만 앓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이제 이 세상에서는 사랑하는 이들을 다시 볼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마지막 순간에는 그것이 못마땅해 그런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랑을 주고도 더 주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며,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 목에 힘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떠나야 할 때를 알고 있었으며, 떠날 채비를 위해 육신을 가볍게 하였고, 참으로 고상한 방법으로 그를 시도하여 이내 성공하고 말았다. 나는 네가 버리고 간 육신조차 버리지 못하였다. 네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두고 간 것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너의 모습이라 쉽사리 잊을 수 없었다. 나는 네가 남긴 것들을 너보다 먼저 떠나보내고는 마냥 그리워했다. 삶에 받는 것보다 갚아야 하는 것이 많다는 법칙도 너에게만은 적용되지 않았다. 그런 것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모든 것을 원래 알고 태어난 듯 완전히 아름답게 행동했다. 네가 버리고 간 육신은 빨갛게 달아올랐다가 대부분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견고한 일부만 남았다. 나의 역사로는 절반을 넘는 시간 동안, 인지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거의 모든 시간을 함께하였음에도, 겨우 이 한 줌이 네가 소유한 전부였다. 그것만을 가지고도 너는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마음을 여는 방법, 믿음을 가지는 방법, 친근감을 쌓는 방법, 진심으로 위하는 방법, 서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 사랑하는 방법, 사랑받는 방법. 이 모든 것은 네가 아니었다면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었을 것들이다. 너는 나의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감정을 불어넣어 세상을 아름...
아무 말 없는 물음 지긋이 바라보는 눈망울 꼭 붙들고 있던 손 어떤 조건도 없던 믿음 들여다보는 눈빛 새근거리는 숨소리 벅차오르던 뜀박질 두근거리는 심박 가만히 붙어 나눠주던 따뜻함 할퀴고 화냈던 짜증 함께하는 기쁨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행복 함께 있고 싶다는 보챔 날뛰다 뒤집어질 만한 반가움 천둥 소리에 놀라 달려왔던 밤 부둥켜안고 울었던 날 괜히 부렸던 어리광 겁을 집어먹고 나에게 일러주며 받던 위로 품 속으로 파묻던 얼굴 애타게 서로를 찾았던 목소리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모든 순수한 감정 빛나던 순간들이 너무도 많기에 모두 엮어 당신을 기억하려 했다 그러고서는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묶어도 당신은 커녕 되려 사랑이라는 말밖에 되지 못함에 탄식했다 몇 획에 담기엔 너무 커 넘치는 것들임에 분명한데 겨우 사랑밖에 되지 않아 슬펐다
너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다 조명이 나를 비추고 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밖에 바람이 불어 덜컹덜컹 울리고 창문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는데 너만 가만히 있다 네가 어떤 소리를 냈던 때 사실 말이라기보다 음악 같았다 바이올린처럼 빠르게 높낮이가 변하다가 피아노처럼 맑은 목소리를 내다가 매끄럽게 내려오는 리듬감 있는 낱말들 그렇지만 지금 너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나는 너의 목소리를 가끔 꺼내보며 악보에다 적었다 X자 머리를 한 음표의 배열 아마 연주할 수 없을 너의 침묵
사천 오백 구십 삼 킬로 미터라고 소리내어 읽었다 . 한 음절씩 끊어 읽으며 연구개에서 공기가 긁혀 나오는 소리 , 입술 사이로 공기가 밀려나오는 소리 , 읽혀지는 소리를 들었다 . 발음하여 읽는 것은 눈으로 읽는 것과 조금 다르다 . 네 개를 나타내고 싶을 때 4 라고 적지만 , 읽을 때는 사아 - 라고 발음하는 것 처럼 , 소리내어 말하는 것은 눈으로 읽는 것와 다르다 . 사 , 오 , 구 , 삼 각 숫자들을 말할 때 ,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는 바로 그 순간에 , 음절들은 각자 길을 놓는다 . 사천 오백 구십 삼 킬로 미터를 차례로 , 천 킬로미터짜리 큰 걸음을 네 번 , 백 킬로미터를 다섯 번 , 십 킬로미터와 일 킬로미터도 펼쳐 내놓는다 . 비행기를 타고 여섯 시간을 가도 모자란 거리를 , 소리내어 읽을 때면 몇 글자 만에 도달할 수 있다 . 천천히 발음하며 , 길을 놓으며 .
 참 새삼스런 사실이지만 바람이나 소망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잠깐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던 일들은 금방 질려버렸고 아름다운 것들은 나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저주를 내뱉고는 사라져버렸으며 소중히 여기고 나를 사랑해준 모든 것들은 부스러져 떠나갔다 주위에 남은 것은 이해한다 말하며 시시하고 보잘것없는 남은 것이나 삼키고 싶어 모든것을 던지라 말하는 변변찮은 것들 뿐이었다  보고 듣고 느낄수밖에 없는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중요한 것들을 뺏기지 않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 집어넣고는 문을 잠가버렸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수많은 선물을 소진시켜버렸다 그리고는 슬퍼서 그런 근사한 선물을 받았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리고는 엉뚱한 다른 곳에서 그것들을 찾는 데에 열중했다 우리는 그렇게 온 인생을 낭비하고 우울이란 상실감의 일종인데 엄밀히 말해 상실한 대상은 존재하지 않아. 우리는 가진 적이 없고 이상 또한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잃어버린 적도 없고 상실한 적도 없는 거야. 그렇다면 그 다음은 뭘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 우울함이 주는 방향을 가지고 쟁취해야 할 대상을 찾아가야 해. 감정에 집중하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다 보면 우리가 도달하지 못하는 비장소,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을 거야. 정말로 영원이라는 정류장이 있으면 좋을텐데 하고 눈을 감았다. 영원은 금방 지나치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에 벨을 눌러야 내릴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내리기만 하면 영원히 함께, 너와 손잡고 갈 수 있겠지. 그곳에 가면 쓸쓸하진 않겠구나, 생각하고는 꿈을 꿀 것 같은 기분으로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