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밤의 느티나무처럼, 그리고 바람을 타듯 팔을 조금씩 조금씩 흔들었다.
말들을 떠올리다가 지웠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나니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하지만 그건 실제일까.
가로수 밑에 서서 코를 팽하고 풀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뭔가가 바뀌었을까.
바뀌면 얼마나 바뀔 수 있었을까. 가로수는 잎을 다 떨구고 서서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오래 울고 난 사람의 아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질문들을
하기에 여기는 너무 한낮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정오가 넘은 지금은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한낮이었다.
김금희<너무 한낮의 연애> 발췌